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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joe 의 일상/episode 3_지조는궁금해

코코샤넬(Gabrielle Chanel)을 존재하게해준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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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복은 샤넬 전과 후로 나뉜다."
는 유명한 문구를 과시하는 패션계의 여왕 샤넬! 매년 20조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2019년 당시 약 1410조 원
의 기업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지? 오늘은 그런 샤넬의 파란만 장한 삶 위에 세운 샤넬제국이 있기까지 샤넬의 인생에 영향을 준 샤넬의 연인들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줄게.
 

불행했던 샤넬의 어린 시절
 
여성의 지위가 최악이던 1800년대 가난한 하층민의 딸로 태어난 샤넬은 12살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라나게 돼.
18살이 되던 해에 샤넬은 고아원에서 나와 물랭에 위치한 기숙학원으로 가게 되는데, 돈이 없던 샤넬은 엄청난 차별을 받게 되고, 그때 샤넬의 돈과 성공에 대한 엄청난 집착이 시작되게
되지.

 "나는 아주 어렸지만 사람은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그리고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았던 현명한 여자 아이였던 거지. 19살이 된 샤넬은 성공의 첫 기회를 잡게 되는데, 기초적인 바느질 기술을 밑천으로 물랭에 있던 상점에서 보조 재봉사로 취직하게 되었어. 돈과 성공에 집착하게 된 샤넬은 밤낮으로 상점일과 아르바이트를 겸하면서 까지 정말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살아내.
그 당시 아르바이트로 선택한 건 물랭에 주둔하던 군인들을 위한 음악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어.
샤넬은 그곳에서 노래를 불렀고 <코코 리코><누가코코를 보았니?>라는 노래로 카페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지. 이를 계기로 사람들에게 '코코'라는 애칭을 얻게 되고
'코코샤넬'이라고 불렸다고 하네?
프랑스어로 '코코트(Cocotte)'가 매춘부라는 뜻이어서 샤넬은 그렇게 불리는 걸 너무 싫어했데.
어쨌든, 그렇게 인기를 얻으면서 샤넬 은 재봉일을 접고 가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오디션을 보게 되는데 줄줄이 탈락을 하지. 어떻게 보면 다행이지? 안 그럼 오늘의 샤넬은 없는 거잖아!!
가수의 꿈이 좌절된 샤넬은 다시 바느질을 하게 되었어.
이 행복하고도 힘든 때에 샤넬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줄 첫 번째 남자가 등장해. 바로 에티엥 발상! 음악카페시절 샤넬에게 푹 빠진 남자 단골손님 중에 한 명이었는데 그 당시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순종적이던 당시여자들과 달리 자존심이 센 샤넬 에게 엄청난 매력을 느꼈고 샤넬을 그의 성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해.
당시 23살의 샤넬은 어떻게 해도 변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벗어나고픈 생각에 '에티엥발상'의 제안을 받아 들 이면서  이 둘의 사랑은 시작이 돼.

음악카페시절의 샤넬

 
 

'에티엥 발상'과의 사랑
상류층에 발을 들이게 해 준 발상!
하지만 행복할 거라는 기대와는 달 리 하층민이라 심한 무시를 받았던 샤넬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승마를 배우게 돼. 그 당시 여자들은 통상적으로 코르셋에 드레스를 입고 말을 탔는데, 샤넬은 여자옷을 개조해 바 지를 입고 승마장에 등장하게 되지.
발상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서 샤넬의 매력들을 더 많이 보게 돼.

샤넬과 발상

당연히 주의의 반응은 샤넬을  미친 사 람 취급을 했어. 코르셋에 드레스를 입는 게 당연했던 그 시절 여자가 바지를 입고 나왔으니 얼마나 웃음 거 리가 되었겠어. 거기다가 하층민의 여자가 그렇게 입고 나왔으니 말이야. 그런데 재미있는 게 , 바지를 입고 말을 타는 샤넬의 모습은 시선 잡기에 는 충분했다는 거야.
뭐 여하튼 그 후로도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샤넬은 하층민으로써의 차별을 견뎌야 만했어. 하지만 샤넬은 굴하지 않았고 상류층의 여자들을 만나면서  몸이 조이고 힘든 옷을 입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유난희 무겁고 큰 여자들의 모자를 보고 사업 아이템 잡게 돼. 프랑스혁명 이후 가발이 금지 금지되었었거든? 상류층 여자들은 가발 대신 머리를 꾸며줄 외출용 모자가 필요했는데, 가발에 꾸미듯 장식과 크기가 엄청나게 컸었나 봐.
샤넬에게 그 무겁고 불편한 모자가 기회로  보였던 거지!

1800년대모자
1800년대 모자
그당시 선보인 샤넬의모자와샤넬

샤넬의 모자는 그야 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때 발상의 친구인 아서보이 카펠을 소개받게 되고 둘은 첫눈에 서로에게 반해.
 

 아서보이카펠과의 사랑

샤넬(왼쪽)과 발상 그리고 오른쪽에 발상의 친구 아서보이카펠


30대 초반에 석탄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아서보이카펠은 샤넬이 사업을 하는데 경제적으로 엄청난 지원을 하게 돼. 대출보증을 서주고, 큰 자금도 빌려주지. 샤넬은 보이의  응원덕에  파리 1구 깜봉거리 21번지에 27살의 나이로 운명의 샤넬 모자 부티 크을 오픈 하게 돼.
샤넬의 첫 번째 도전이었던 모자가게는 상류층 여성과 배우들이 단골손님일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돈과 성공을 잡게 되지.
어떻게 보면 사업가였던 보이는 샤넬의 가능성을 벌써부터 보고 있었을 거야
. 엄청나게 잘 되고 있었지만 샤넬은 꿈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

새로운 목표는 바로 ' 의상디자이너'!

전 세계 패션을 주도하는 패션의 수도  파리에서 고급맞춤복을 제작하는 의상 실'오트쿠튀르'의 대표 의상디자이너인 '쿠튀리에'가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해. 그런 열정의 샤넬이었지만 그 당시 유행했던 옷과는 거리가 먼 편안한 옷을 추구했던 터라 파리에서는 자기 스타일로  성공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파리대신 다른 도시를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정해. 그곳은 바로 휴양지로 알려졌던 '드빌'이었어. 그곳에 이름을 건 최초의 부티크를 오픈하게 되지.
그 당시 상류층 여성복에는 매끈한 라인을 위해 주머니가 없었는데 샤넬이 처음 선보인 의상에는 주머니를 넣었던 거야.
파격적인 시도를 한 옷을 입고 샤넬은 직접 입고 홍보를 하게 되고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어.

직접옷을 홍보하고있는 샤넬(오른쪽)


샤넬의 옷은 관심 끌기에 충분했고 마케팅은 대성공을 거두지. 그때부터 샤넬의 옷을 사기 위해  앞다투어 드빌
의 샤넬 부티크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해. 샤넬의 드빌 부티크는 정말 하루도 방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혼잡했다고 해.
그때 마침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게 돼. 드빌은 휴양지였기 때문에 샤넬의 옷을 살 손님들은 모두 떠났지만 그때 파리의 상류층들이 드빌로 피난을 오게 된 거야. 성공의 운도 따랐지?
매일 조이는 코르셋에 치장이 잔뜩인 옷들을 입었던 상류층 여성들에게 샤넬의 옷은 매력 그 자체였어.
드빌의 성공으로 샤넬은 또 다른 휴양지를 물색하게 되었고, 중립국이라 전쟁의 영향이 적었던 스페인을 선택하게 돼. 샤넬의 도전과 선택은 적중했지! 지리적 이점 덕분에 온 유럽귀족들이 샤넬의 옷을 알게 되었고
샤넬은 보이의 투자를 받아 고급별장
에 다른 부티크를  또 오픈하게 돼. 상류층은 항상 현금이 많이 있다는 걸 깨달은 샤넬은 값비싼 옷으로 자신을 차별화하고 싶었던 상류층을 공략했고 정확히 맞아 들었어.

그 당시 샤넬이 옷 한 벌을 만드는 값은 약 7천 프랑이었는데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약 50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이 라네, 큰 성공을 거두면서 샤넬은 직원을 무려 300명을 거느리게 되었어
. 그 당시 상류층 여성들에게 샤넬의 옷이 필수품처럼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옷을 판매했겠냐고.
샤넬은 임대매장의 건물들을 모두 사버리고 보이에게 받았던 현금에 이자까지 모두 보이에게 다시 돌려주 는 사업가로서의 대성공을 맛보게 되지
. 35살의 샤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보이.
그런데 이런 샤넬에게 상상도 할 수없었던 '보이의 사망소식'을 듣게 돼.
샤넬을 만나러 오는 길에 큰 사고가나
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샤넬은 부서진 자동차 잔해를 쓰다듬으며 몇 시간을 오열했다고 해. 그렇게 보이와는 여상치 못한 이별을 맞이하게 돼.